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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기까지의 역사2023-05-09 18:13
작성자 Level 10

 

홀로코스트가 발생한지 3년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살아난 많은 사람들 여전히 임시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이라 불렸던 영국 통치하에 있는 유대인의 고향 땅 이스라엘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1945년 10월 어느 추운 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한 그룹이 그들의 영웅인 데이빗 벤 구리온을 몰았던 군대 짚차를 덮쳤고, 그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임시 수용소로 데려갔습니다.   

1935년 이후 벤 구리온은 국제 쥬이시 에이젼시의 리더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즉 오늘날 이스라엘로 이민해 오는 것을 까다롭게 했던 법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땅은 당시에 영국의 통치령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세계는 6백만명을 잃은 타격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벤 구리온이 청중들에게 연설하기 전, 생존자들은 시온주의자들의 애국가 하티크바- 그 희망이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알지 못했던 사나이 벤 구리온도 

눈물을 함께 흘렸습니다. 

 생존자들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땅으로 이민 가기를 간절히 원했고, 벤 구리온도 그것을 간곡히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랍 세계의 반대와 폭력사태를 두려워한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을 허락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는 절대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이전에 “하블라가” 라고 불렸던 제한 정책으로 영국과의 협상에 최선을 다했던 벤 구리온은 이제 영국이 다른 묘수를 써 보라고 장려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지하 군사 조직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팔레스타인 해변으로 밀입국 시켰고, 영국의 규칙들을 지키기에 너무 어려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 181은 영국 통치령 팔레스타인을 두개의 독립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내었습니다. 

 아랍국가들은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은 어느 땅에서도 허용할 수 없다며 그 결의안을 일제히 거부하였기에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엔이 허락한 분할령은 이스라엘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땅을 준 것이었고, 지리적으로도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이스라엘의 고대 고향 땅을 여기 저기 흩어 놓은 것 같은 

지역을 준 것이었습니다.

 유엔이 이것을 결의하고 12일 째 되는 날, 아랍 테러리스트 그룹들이 유대인 남성들과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을 공격하여 80명의 유대인들을 죽였고, 도로에 운행하던 유대인 버스들

을 공격하고 유대인 가게들을 겁탈하였습니다. 

유대인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그들의 동족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종종 영국 군대에 의해 저지되기도 하였습니다. 

시리아와 이라크 병사들은 예루살렘의 반을 차지하던 유대인들을 포위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도우기 위해 서둘러 진군해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10만명의 유대인 거주민들을 가두었고 물과 음식을 차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중요 거점들과 아랍의 요새들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들이 있었습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은 팔레스타인 통치령을 끝내고 팔레스타인에서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하였을 때, 이미 유대인들은 수 천명의 동족들의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아랍인들의 테러는 더 강화되었고 고립된 유대인 정착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5월 12일 케이파르 에찌온 유대인 공동체 마을이 사로 잡혔고, 항복한 100명의 유대인들이 기관총에 의해 사살되는 것이 방영되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적군이 이스라엘 군대보다 훨씬 많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병사들이 강력한 전투 정신과 우리의 전략과 전술로 적군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보고도 받습니다.

 

벤 구리온은 전술로 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무기들을 그 곳에 들여오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곧 들이닥칠 전쟁에 무기도 거의 없었고, 공식적인 공군력도 없었습니다. 

유대 국가 건설을 연기하라는 미국과 유대인 리더쉽 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4일 벤 구리온은 그 감동적인 이스라엘 국가” 라는 연설을 하게 됩니다. 

  다음 날 레바논이 이스라엘의 북쪽을 공격했고,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동쪽에서 이스라엘의 동쪽지역을 침공해 왔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군대가 연합한 이집트는 남쪽을 침략하고 텔 아비브를 폭격하였습니다. 


몇 일 만에 이스라엘은 사방에 적군으로 둘러 싸이게 되었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할 절대 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음식과 물로 생존해야 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군사 요충지인 라툰지역으로 서둘러서 필사적인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유대인 병사들은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총을 어떻게 쏘는 지도 몰랐던 최근에 이민 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었고, 물을 공급할 보급부대 조차도 없었습니다. 

이 때는 아주 뜨거운 날씨가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라툰 요새를 향한 유대인들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고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몇 일 후, 예루살렘의 성스러운 올드 시티 안의 유대인들은 요르단 사람들에게항복

야 만 했는데 그들은 고대 회당들을 서둘러서 파괴했고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요르단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제 막 탄생한 이스라엘의 운명이 벼랑 끝에 놓였을 때, 5천명의 훈련된 용병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도 있었고 비유대계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외국에서 온 많은 용병들은 훈련된 공군 조종사들이었고, 곧바로 이스라엘 공군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948년 5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구입한 네 대의 경비행기가 동체와 부품들이 분리된 채로 이스라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에 수천개의 이집트 부대들이 텔 아비브 앞 20 마일 지점까지 올라 온 상태였습니다. 

비행기를 조립한 후 테스트 할 시간도 없이, 네 명의 조종사들은 이집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비행기들은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고, 한 명의 조종사는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행기들의 공격은 이집트 군의 확신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 다른 그룹의 용병들은 미국인들의 코 앞에서 몰래 구입하였던 전투기를 타고 불법으로 이스라엘로 날아 왔습니다. 

그들은 착륙하고 몇 시간 후,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1948년 6월 11일 유엔의 중재로 정전 협정이 이루어졌습니다. 


3주동안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었는데, 벤 구리온은 그 기간동안 정말 필요했던 많은 무기들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비공식적인 시온주의 민병대들이 이스라엘 방위군 (IDF)의 명령을 따를 것을 법으로 제정하였습니다. 

정전 협정이 끝났을 때, 이스라엘은 더 강한 군사력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조금씩 더 많은 무기들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여전히 고립된 많은 유대인 정착촌들은 아랍의 강력한 공격들을 막아 설 무기들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기적적으로 유대인 농부들은 강력한 저항으로 그들의 땅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남부의 한 키부츠의 주민이 말하길, “우린 맨 몸으로 북쪽에서 쳐들어 온 적을 막아내었다..” 

1948년 10월 15일 두 번째 정전 협정이 끝나자 이스라엘 방위군은 대부분의 적군을 그 땅에서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3월 10일, 이스라엘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오늘날 에일랏 도시인 움 라쉬라쉬가 있는 팔레스타인 남부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 당시 인구의 10 퍼센트를 잃었고,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국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치루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독립 전쟁동안 5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현재 이스라엘 영토가 된 곳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역사가 마르틴 길버트 경에 의하면, 당시 요르단의 정책은 자기의 난민들을 계속 분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더 심화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적대적인 아랍 난민들을 다시 흡수하지 않는 한 그들은

모든 공식적인 평화 조약들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페허가 된 이스라엘 인구 안으로 끊임없는 테러의 물결을 초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이스라엘의 연약한 경제는 3년 안에 많은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되어 온 80만 유대인 난민들을 수용해야 만 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독립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아랍국가들은 그곳에 살던 유대인 시민들을 폭행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중동 지역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들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 당하였고, 십원도 없이 이스라엘로 와야 했습니다. 

더 심한 것은, 이민 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로서 데이빗 벤 구리온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위한 사회 기반 시설 건설에 집중하였고 

이제 재건된 이스라엘의 유대 국가에서 함께 살게 된 다양한 배경의 유대인들의 연합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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