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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스라엘이 우간다에 세워질 뻔 했던 사건2023-05-09 17:53
작성자 Level 10

[이스라엘이 우간다에 세워질 뻔 했던 사건]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우간다 계획안”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헤르첼을 알아야 합니다. 

테오도르 헤르첼은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1860년태어났습니다.  

헤르첼은 비엔나 대학의 학생으로, 상당한 반유대주의를 경험했습니다.  

1895년 반유대주의 정당들이 오스트리아 선거에서 대승하면서, 헤르첼은 반유대주의에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의 신앙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이 나라의 모든 공동체들과 모든 곳에서 함께 연합하려고 진실되게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참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헤르첼은 “바로 유럽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오직 유대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라는 생각을  절실히 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한 장소로 모은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첼은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살고, 자치 정부를 가질 수만 있다면 팔레스타인, 아르헨티나, 콩고, 어디라도 그들을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여러 곳을 살피고 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렸던 이스라엘 땅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의 조상의 땅이었고 2천년간 유대인들이 기도해왔던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소망은 늘 이 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헤르첼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자치국가를 건설하려는 생각을 확신습니다.   

 

“유대국가”라는 저서에서 비젼을 제시한 헤르첼은 오토만 제국의 황제 술탄에게 영토의 한 부분을 유대인들에게 넘기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03년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러시아의 키쉬네프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집단 폭행과 학살이 자행되어 전 세계 유대인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유럽은 어느 한순간에 유대인들의 두개골을 도끼로 찍어 버리는 만행들이 빈번해지므로, 어떤 유대인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유럽국가들이 해결해 주기를 간청했지만, 유럽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은 마치 유대인들의 무덤과 같았습니다. 

헤르첼은 동족 유대인들을 유럽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르첼은 1903년 6번째 시온주의 회의 때, 공식적으로 “아프리카 동부에 임시적인 유대인의 거처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하는 기이한 일을 합니다. 

당시 헤르첼은 대영 제국과 같은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들을 설득 하고 있었습니다. 

국은 헤르첼에게 오늘날 “우간다”라고 하는 영토를 제안했습니다. 

헤르첼은 시온주의 의회에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릴 때까지 우간다 이 땅을 당분간 안전한 피난처로 사용하면 어떨까요?” 라고  제안합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40년간 광야에 머문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 처럼, 임시적인 처소로 그  땅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너무 이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의회의 많은 이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자인 러시아인들조차도 금식으로 투쟁을 선언 했습니다. 

어떤 종교 시온주의자들은 그의 제안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회는 우간다 정탐을 위해 투표를 실시합니다. 그결과(295명 찬성, 178명 반대, 기권 99)는 정탐을 보내자는 의견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헤르첼은 의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며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며 맹세하였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나의 오른 손이 불구가 되어 버리길 원하노라” 

세 명의 우간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를 하였는데, 

정탐꾼들 중에 유일 유대인이었던 나훔 윌버쉬는 농사짓기에 가장 윤택한 땅인 동부 아프리카를 “사람이 절대 거주할 수 없는 땅” 이라고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헤르첼은 제 7차 시온주의 회의를 보기도 전에, 유대 국가가 건설되기도 전에 사망했습니다. 

제 7차 시온주의 회의는 윌버쉬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1905년 헤르첼의 “우간다 계획”은 취소되었습니다.     

1897년 헤르첼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한 첫번째 시온주의 의회에서, 나는 이미 유대 국가를 건설하였다. 내가 오늘 이것을 큰 소리로 외친다면 모든 사람이 웃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5년 내에, 그리고 확실히 50년 내에 모든 이들이 유대국가를 보게 될 것이다.” 

헤르첼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었습니다.

의 말은 옳았습니다. 

정확히 50년 후인 1947년, UN은 팔레스타인 분할령을 포고하였고, 

곧 벤 구리온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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