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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변화된 것들2020-02-19 12:44
작성자 Level 10

0 교회가 예배중심에서 교회건물 중심으로

로마국교 이전의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는 성도들이 모인 예배공동체 였다. 그러나 로마 국교가 된 교회는 교회건물이 중심이 되었다. 초대교회생활의 중심은 가정교회였다. 지역 교회들은 매주마다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나누었다. 큰규모의 집회도 정기적 으로 모이기는 했지만 가정교회가 교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 시킨후 그는 로마에 성 요한 라테란(St. John Lateran)교회를 건립했다. 교회건물은 바실리카(Basilica) 양식으로 지어 졌는데, 그 내부 구조는 황제의 궁전 왕좌의 구조로 지어졌다. 이와같은 교회건물은 로마 전역에 건립되었 고 콘스탄티누스는 "기도의 집"을 폐지시키고 크리스챤들이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율을 제정 시행했다. 그 법령은 카톨릭교회가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예배하 는 것을 금지 하였다. 교회의 개념이 예배중심에서 건물중심으로 바껴버린 것이다.


0 성령의 인도함을 받던 예배가 의식을 따라하는 예배로

초대교회 예배는 성령의 임재와 기뿜과 친밀감이 있었고 정해진 예배형태나 의식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가 드려졌고, 예배중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 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국교가 된 교회 예배는 정해진 교회건물에서 엄숙한 공공의식이 되 었다. 예배의 순서가 명문화 되어 고정된 형식의 예배로 바뀌었고 향을 피으며 촛대를 놓 는 일들이 예배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기뻐뛰며 춤추며 부르던 찬 송도 사라졌고 그대신 로마 궁중의식에서 행해지던 엄숙한 분위기에서 별도로 조직된 성가 대에 의해서 찬송이 불려졌다.


0 초대교회에 있던 유대적 요소들을 제거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유대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고, 이들은 유대인의 풍습 을 지키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전해받은 이방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유대인들과 예배공동체로서 생활해 왔다. 그러나 태양신 숭배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기독 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내에 있는 유대적 요소는 물론 유대인 자체를 미워 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각 교회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회가 유대적 풍 습을 따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와같은 황제의 뜻에 따라 각 교 회들은 유대적 요소들을 교회내에서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 안디옥 공의회(AD.345) "만약 이 결의후에 감히 유대인들 처럼 유월절을 준수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주교건, 또는 부제건간에 공의회 판사들은 그들을 교회로 부터 파문시키고, 저 주(아나테마)할 것이다. 이 공의회는 그들의 지위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감히 그들과 연락 을 취하려는 자들도 모두 그 지위를 박탈 할 것이다."

  • 라오디게아 공의회(AD.365) " 유대인들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 며, 그들과 함께 만찬을 주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신조 37항). 크리스챤들은 안식일 에 쉼으로서 유대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 날에 일을 해야 한다...그러나 누구라도 유 대주의자 라는것이 발견되면 그자를 그리스도로 부터 파문시키고 저주할 것이다."

  • 프랑스 아그드 공의회(AD.506)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의 잔치에 참가해서는 안된다."

  • 제10차 톨레도 공의회(7세기경) "부활절은 한결같이 지켜저야 한다."(유월절이 아닌 니케 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날에)

  • 제2차 니케아 고의회(AD.787) "공공연하게 혹은 비밀스럽게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는 자들은 영성체에도, 기도에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받아드려져서는 안될 것 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내에서 유대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같은 노력을 하였음 에도 7세기에 이르도록 교회평의회에서 여전히 유대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결의를 하는 것 을 보면, 그 때까지도 교회내에 유대적 영향이 남아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0 기독교가 이교와 혼합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신 미트라에게 기도하던중 십자가의 환상을 본 그는 예수님이 분 명 미트라의 화신이라고 생각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독교로 개종 하였음에도 태양숭배 사상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AD321년 크리스챤들이 예배하는 날을 로마의 공휴일로 정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그 날 을 주일이라 부르지 않고, "태양의 숭엄한 날"이라고 불렀다.(그로부터 오늘의 sunday란 단어가 나왔다)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기독교가 이교와 혼합되는데 지대한 영 향을 미쳤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 절기를 지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누 스 치하의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 축제일을 기독교 절기로 지켰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 의 탄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오래전 부터 12월 25일을 미트라(태양신) 탄생일로 축하해 왔다. 예수님이 미트라의 화신이라고 생각한 콘스탄티누스는 12월 25일 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선포하고 축하하게 하였다.


교회가 유월절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거스리는 것이였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축전을 불법화 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춘분 점 이후의 첫보름달이 뜨는 주간의 일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지시 했는데, 그것은 로마 가 지키는 봄의 풍요의 제전으로 지키는 기간이였다. 로마인들은 풍요의 여신을 위한 축제 를 매년 벌렸는데, 가나안인들은 이여신의 이름을 "아세라"라고 불렀고, 페르시아인들 은 "이스타르테", 바벨론인들은 "이슈타르"라고 불렀다. 고대 브리튼인들은 "이스터"라고 불 렀다. 풍요의 여신 이스터의 상징은 달걀이였다. 고대 이교도들은 달걀로 장식을 하고 이 축제를 기념하는 뜻에서 달걀을 선물로 주곤 했다. 니케아 공의회가 성경적 근거로 지켜졌 던 예수님의 부활기념 축제를 이교여신의 축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어권 국가에서는 부활절을 지금도 이스터데이(Easster day)라고 부르 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절을 이교여신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 가 되는가?!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가 됨으로써 이교 신전들은 교회건물로 바 뀌고, 이교 성소들은 기독교 성소가 되었다. 심지어 이교 사제들도 이름만 바꾼 기독교 사 제로 되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위대한 처녀" "신의 어머니"로 불렸는데, 이 여신의 상징물은 그 녀의 아들 호루스를 안고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캐톨릭교회의 마리아와 예수님의 그림 과 같지 않은가? 이시스의 숭배자들은 이시스를 마리아라고 부르며 이시스를 합법적으로 숭배할 수 있었다. 다른 이교 숭배자들도 기독교 성인과 순교자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들 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기독교적 이름으로 바꾼뒤 합법적으로 이교 숭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는 이교와 혼합 되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회내 상당수의 지도자 들이 기독교 신앙보다 이교신앙을 가진자들이 더 많아 지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은 오히려 제국주의 적으로 몰려 박해를 받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겉모양은 기 독교 였으나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 이들중에 진실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울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성경은 일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여저서, 읽을 수 없도록 강대상에 몪여 있 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로마국교가 된 기독교는 살아서 움직이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침묵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교회에게 주신 풍부한 기독교적 유산을 잃 어버리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은 이렇게 잃어버린 초대기독교 유산들을 얼마나 찾 았고, 회복시키고 있는가?!


- 김목훈-


(이 글은 Robert D. Heidler의 "The Messianic Church Arising"과 유재덕의 "기독교 역사"중에서 선별하여 나의 견해와 독후감과 함께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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