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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시오니즘 (출처 이스라엘 대사관) 2020-02-19 12:42
작성자 Level 10

*아래글은 1995년 벤야민 네버거 교수(Prof. Binyamin Neuberger)의 ‘시오니즘’에서 발췌한 것임


시오니즘의 어원은 성경에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땅(에레즈 이스라엘)을 뜻하는 “시온”에서 왔다. 시오니즘은 그들의 역사적인 고향인 시온 즉 이스라엘땅에 대한 유대인들을 열망이 나타난 이데올로기이다.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희망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유수를 떠났던 2천5백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후 현실로 실현된 희망이었다.(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9세기에 통합된 정치적 시오니즘이 이스라엘로의 귀환이나 그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시오니즘은 고대의 생각과 지속되는 활발한 운동을 적절히 받아들였고 그것들을 시대의 필요에 따라 조정한 것이다.

시오니즘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건국선언(1948년 5월14일)에 명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이스라엘땅은 유대민족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처음 국가를 세웠고 국가의 그리고 세상의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해냈으며 세상에 책 중의 영원한 책, 성경을 탄생시켰다.

외세의 압력으로 이스라엘땅으로부터 유배된 후 이스라엘 민족은 유랑생활 내내 이스라엘땅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있었고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기도와 희망을 결코 멈추지 않았었다.”



시오니즘의 

근거

시오니즘의 사상은 유대민족과 그들의 땅 사이에 오랜 유대를 기초로 한다. 이 유대는 아브라함이 이후 이스라엘의 땅이 된 가나안에 정착한 거의 4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오니즘 사상의 중심에는 유대민족의 역사적 탄생지로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생각과 그밖에 다른 곳에서의 유대인의 삶은 유랑생활이라는 믿음이 자라잡고 있다. 모세 헤스(Moses Hess)는 그의 저서 로마와 예루살렘(Rome and Jerusalem, 1844)년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기술했다.

“두 기간동안 유대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이후의 시기였고 그리고 두번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환한 시기였다. 세번째는 세번째 망명에서 돌아오는 때가 될 것이다.”

다아스포라의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적 고향과 유일한 그리고 강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또한 의식과 문학을 통해 시온을 향한 열망을 표출해왔다.

시오니즘이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땅에 귀속시키는 역사적 연계를 나타내지만 현대 시오니즘는 수세기 동안의 박해로 이어진 근대 반유대주의에 의해 19세기 민족적인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대두되었다.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 잉글랜드와 웨일즈 등 거의 모든 유럽 전역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게 된 것은 여러 번 반복된 경험으로 그들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9세기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이스라엘로의 귀환)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시오니즘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세 헤스는 다마스커스 유혈탄압(1844)에 자극받아 시오니스트 사회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레온 핀스커는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암살에 뒤이은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1881-1882)에 충격 받아 히밧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테오도르 헤쩰은 파리에서 기자로 드레퓌스사건이라는 악의에 찬 반유대주의 운동을 경험한 이후 시오니즘을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하게 되었다.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인 문제 즉 소수민족을 벗어날 수 없는 문제, 반복되는 조직적인 학살과 탄압에 대상이 되는 민족이자 유대인 거주하는 어느 곳에서나 탄압에 의해 고통이 가중되는 고향 없는 공동체라는 문제를 해결할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이스라엘땅으로의 귀환을 달성함으로써 이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알리야(aliya-이스라엘로의 이민)의 역사는 많은 부분 유대인들을 향한 살해와 차별에 직접적인 반향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알리야는 이스라엘땅에 다수의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 유대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에 강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정치적
시온주의의
대두

정치적 시온주의는 유대민족의 민족 자유운동으로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19세기에 대두되었다.

시오니즘은 자유민족주의, 자유와 통합이라는 두개의 목적을 합성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을 외세의 적대적이고 탄압적인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세계 곳곳에서 유랑중인 유대인들을 유대인의 고향으로 불러들여 유대인 연합체를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시오니즘의 대두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대인 계몽운동인 하스칼라의 실패에 대한 반향으로 대두되기도 했었다. 시오니스트 원칙에 따르면 이런 실패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족적 문제는 민족적 해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민족의 해방과 평등 없이는 개인의 해방과 평등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의 민족적 해결방안은 역사적 고향에 유대인을 다수로 하는 유대인 국가의 설립이었다. 그리하여 유대인 민족의 권리를 민족자결권으로 실현한다는 것이다. 시오니즘이 보편적인 목적과 가치에 위배되는 유대인 민족상황의 정상화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시온주의는 지구상 모든 민족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주적인 민족만이 세계의 민족들 사이에서 하나의 동등한 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오니즘
- 다원주의
운동

시오니즘이 기본적으로 유대민족을 위한 자유와 독립, 국가 그리고 안보를 쟁취하기 위해 유대인의 고향으로의 귀환을 주장하는 정치적으로 운동이기는 하지만 시온주의는 또한 유대 문화의 재확립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재확립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오랫동안 제의언어로 그리고 문학으로만 제한되어 왔던 히브리어를 살아있는 국어로 정부, 군대, 교육 및 과학 그리고 시장이나 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오니즘은 다른 사상들과 상호관계하여 시오니스트들의 조류와 하위조류의 형성시켰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은 자유 시오니즘을 탄생시켰다. 사회주의 통합은 사회주의 시오니즘 양산했다. 깊은 종교적 신념과 결합된 시오니즘은 종교시오니즘을 낳았다. 그리고 유럽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극우 민족주의 시오니즘 분파도 생겼다. 이런 면에서 시오니즘은 다양한 자유, 전통, 사회주의(좌파) 그리고 보수주의(우파) 등 여러 분파를 양산한 다른 민족주의 운동과 결코 다르지 않다.




시오니즘과
아랍 민족주의

대부분의 시온주의 창시자들은 팔레스타인지역(이스라엘땅)에 아랍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일부는 단순히 “땅이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이 없는 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소수만이 아랍인의 존재가 시오니즘 달성의 진정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아랍 민족주의는 어떤 형태를 띄고 있지는 않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구는 희박했으며 비정치적이었다. 많은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은 토착 공동체들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귀환과 그들과의 마찰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들은 이어질 국가의 개발이 두 민족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며 따라서 아랍의 인정과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또한 확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성취되지는 못했다.

평화적인 수단과 협력에 의해 그들을 목소리를 쟁취하려 했던 시오니스트 이상주의자들이 천명했던 그들의 기대와 지위와는 반대로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 유대인들은 호전적인 아랍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동안 많은 시오니스트들은 그 분쟁의 강도와 깊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것은 사실상 국가에 관한 그들 자체로서 두 민족사이의 충돌이 되었다. 즉 그들의 역사적 정신적 유대의 실체를 주장하는 유대민족과 그곳에서 수세기 동안의 존재를 주장하는 아랍 민족간의 충돌이었다.

1936년에서 1947년까지 이스라엘 땅에 대한 투쟁은 점점 더 심각해 졌다. 아랍의 반대는 유대인 공동체의 개발과 성장이 점점 더 확대되면서 더욱 극단적이 되었다. 동시에 시온주의 운동은 유럽의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유대인들을 구하고자 이민을 증가시키고 국가의 경제적인 기반시설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대인들과 아랍국가간의 숙명적인 대립으로 인해 UN은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강 서쪽 지역에 두개의 국가의 설립을 권고하게 되었다. 즉 하나는 유대인의 국가이고 하나는 아랍 국가였다. 유대인들은 그 결의안을 받아들였으나 아랍국가들은 그것에 반대했다.

1948년 5월 14일 1947년 11월에 선포된 유엔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건국되었다.




오늘날의
시오니즘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인들을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그들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역사적 고향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를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법적으로 확립한다는 시오니스트들의 목적을 실현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1948년 이후로 시오니즘은 유랑자들의 귀환을 계속 장려함으로써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위험에 처한 유대인 공동체들을 구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에 경주한다. 또 어디서나 유대인 삶에 이스라엘이 그 중심이라고 강조할 뿐 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단합과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수세기를 거쳐오면서 이스라엘땅에서 유대민족의 회복을 위한 열망은 유대민족을 하나로 묶는 희망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시오니즘을 유대사상의 기본 기조로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을 시오니즘의 기본적인 실현으로 지지하며 이스라엘의 존재에 의해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윤택해진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일원이며 유대정신의 약동적이고 창의적인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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