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스라엘을 배울 때’를 마치며 5조 정 훈 영 (67기) ‘유대인’이란 이름은 내게, 마치 공부는 잘하지만 쌀쌀맞아 오만한, 얄미운 동창생 같은 느낌을 준다. 가진 것도 없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어찌 그리도 똑똑하고 당당하고 야무진지, 한마디로 연구대상이다. 그래서 정은 별로 가지 않는데 늘 궁금하기는 하다. 과거 역사 속에 비춰진 유대인들은 어디에 떨궈 놓아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밖을 향해 발톱을 세우고 격리를 자청한 채 살아가는 독한 이미지를 보여 주었고, 오래 전 딱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사막에 뿌리내린 단단한 선인장 같은, 남부러울 것 없는 모습으로 보였기에, 최근의 정치 군사적 고립과 같은 어떤 어려운 상황도 결국 이겨낼 사람들이란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신뢰의 믿음이라기보다는 방관하는 입장이었다는 게 맞다. 이번 강좌는, 그 얄미운 동창생으로 인해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됐고 그러는 동안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내야 했으며 이제는 그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더불어 속이 후련해진 한 가지는, 개인적으로 긴 시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대인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은 그들이 겪은, 특히 ‘홀로코스트’의 고통은 그 죄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이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해도 너무 했다는 절망감이 한 견에 늘 있어서, 과연 인류역사에 다시없을 이 비극이 꼭 일어났어야 했는지 궁금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마음이고 계획인지 분별하기 어려웠고 꼭 한번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수업 중에 스가랴 1장 14-15절 말씀을 그 답으로 주셨다.(“...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내가 크리스찬으로서 이스라엘에 빚진 자이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왜 위로해야 하는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 강좌를 듣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유투브에서 정태권 선교사님의 인터뷰 및 강의 동영상 몇 편을 보았고 에벤에젤이란 단체와 알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스쳐가듯 들으면서 ‘그게 뭐지?’하는 심정으로 정보를 찾다가 깊은 고민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나에겐 우연이라고 할 수 밖에. 그렇더라도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오랫동안 먼지 쌓인 베일이 걷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으로 보아 그 발걸음마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셨으리라 믿는다.
뜻하지 않았던 이 시간은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었고 또 다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야 하는 사실의 당위성, 유대인들이 축복의 근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전에 없이 절실해 진 그들에게 빚진 마음과 부담감, 고통을 주었거나 고통을 외면했던 가해공범자로서의 미안함,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회복을 도와야 할 책임감을 깨닫게 된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어수선한 시대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마음과 자세도 좀 더 선명해 질 것 같다.
(*KIBI가 갖가지 이론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전달하는 귀한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