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유월절 - 2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
제 2성전이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기 이전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시민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순례객들,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의 성지 순례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요셉푸스에 의하면 주후 65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적어도 삼백만 명의 순례객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셉푸스의 기록을 신빙성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를 십만명 정도로 추정하며, 유월절엔 그 두배에 가까운 이십만명 정도의 인구가 몰려들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예루살렘의 크기를 오늘날의 옛성(Old City) 전체의 크기로 본다고 해도 이십만명이면 이미 포화 상태이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최소한 일생에 한 번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또한 명절 중 제일 큰 명절인 유월절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는 순례의 시기였다. 유월절은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겨우내 내린 비로 온 들과 산은 녹색으로 물들고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의 여왕이다. 일년 중 예루살렘이 가장 붐비는 시기였다. 모든 여관은 순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집집마다 순례객들로 가득 메워질 뿐 아니라, 빈터마다 순례객들이 친 텐트들로 온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 없이 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민박을 하는 경우 어느 누구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희생 제물로 바친 양의 가죽을 집 주인에게 주는 정도였다. 양 가죽은 양피지를 만들거나 물주머니, 포도주 주머니를 만드는 등 여러가지로 유용했으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 가공하기에는 너무나 번거롭고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텐트에 숙소를 정한 사람들은 유월절 기간 내내 그곳에서 머물었다. 좁은 예루살렘에 그렇게 많은 순례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월절 기간동안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탈무드에선 하나의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순례온 유대인들의 모습도 각양 각색이었다. 시리아, 소아시아, 싸이프러스, 그리스, 바벨론, 로마, 이집트 등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마다 그 지방 특유의 복장과 관습을 갖고 있었다. 언어도 다양하였다. 이 기간동안 예루살렘에선 아람어, 그릭어, 히브리어 등이 혼용되었다.
유월절이 가까와지면 예루살렘에선 양, 소, 향료 등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양이나 소는 이스라엘 내에서 공급되었으나 향료는 멀리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부터 수입되었다. 향료를 실은 낙타의 대열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도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유월절이 가까와져 예루살렘이 인파로 북적거리면 로마의 병사들도 바빠졌다. 지중해 해변의 시세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총독은 유월절이 되면 시세리아 본부로 부터 군인들을 파병하여 예루살렘 지대와 합류시켜 유대인들의 동태를 주시하게하였다. 년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드는 이 때야말로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헤롯 궁 옆에 있던 로마 군대의 요새는 성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높게 건축되어 있었다. 로마 군인들은 높은 요새 위에서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가면 옛성의 욥바 문과 다윗의 탑 사이에 위치한 당시 로마 요새의 기초가 남아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24 반열로 조직되어 돌아가며 한 반열씩 성전의 일을 돕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레위인들은 고향에 머무르며 가사에 종사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성전에 나가서 봉사하였다. 평소엔 한 반열만 성전에서 봉사하고 나머지 23 반열은 고향에 머무르며 가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유월절이 되면 24 반열 모두가 성전에 나가 봉사하였다. 따라서 유월절이 되면 수천명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일을 도왔다.
유월절 전 날
전통에 따라 유월절 하루 전에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 남아있는 모든 빵과 빵 반죽을 없애야 되었다. 유월절엔 절대로 누룩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월절 전야가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올리브 램프에 불을 켜고 혹 빵 부스러기라도 집안에 남아있진 않은지 샅샅히 뒤졌다. 찾아낸 빵이나 빵 부스러기, 반죽 등은 한 곳에 모아 놓고 성전에서 보내는 신호를 기다렸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유교병(누룩이 들어있는 모든 빵이나 반죽)을 불에 태워 없애야했기 때문이다. 신호는 감사 제물로 바쳤던 유교병 두 덩어리로 하였다. 유월절 전 날 제사장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된 화목제의 감사 예물로 드렸던 빵(유교병) 두 덩어리를 성전 바깥 회랑 꼭대기에 올려 놓았다. 빵(유교병) 두 덩어리가 회랑 꼭대기에 보이는 동안엔 유교병을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제사장이 한 덩어리의 빵을 치워버려 단지 한 덩어리의 빵만이 보이면 그 시간부터 유교병(빵)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사장이 두번 째 빵마저 치워버리면 그 것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유교병을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것만 가지고는 예루살렘 온 시가지에 정확한 시각을 알릴 수 없었다. 성전이 잘 보이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보조 수단이 강구되었다. 제사장들은 감람산 꼭대기에 두 마리의 암소를 데려다가 쟁기질하게 하였다. 두 마리 다 쟁기질 하고 있으면 아직은 유교병을 먹을 수 있다는 표시였고, 한 마리만 쟁기질 하고 있으면 그 시간부터 유교병을 먹을 수 없다는 표시였다. 나머지 한 마리마저 보이지 않으면 즉시 유교병을 불에 태워 없애라는 표시였다. 시계가 없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다같이 동시에 유교병을 없앨수 있었다.
유월절 첫쨋날 유월절 첫날 점심 무렵이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양이나 염소를 어깨에 메고 성전으로 나아갔다. 오후가 되면 평소보다 한시간 이른 오후 세시경에 제사가 시작되었다. 제사는 세 차례 반복되었다. 첫번 째 들어온 예배자들이 성전 뜰을 가득 채우면 레위인들은 성전 문을 닫았다. 성전 문이 닫히면 쇼파를 불어 희생제사가 시작됨을 알렸다. 양이 도살되는 동안 레위인들은 주악에 맞추어 감사찬송을 불렀다. 첫번 째 예배자들의 희생제사가 끝나면 두번 째 예배자들이 자기들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왔다. 두번 째가 끝나면 세번 째 예배자들이 성전에 들어온다. 당시 세번 째 예배자들은 '게으름뱅이들'이라고 불리웠다. 힐렐 시대에 한 번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늙은이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깔려죽은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크게 각성한 유대인들은 유월절 희생제사를 엄숙하고도 질서있게 진행하였고 그 결과 예수님 당시엔 두 시간 정도에 모든 유월절 희생 제사를 질서있게 마칠 수 있었다.
희생 제사를 끝낸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희생 제물을 어깨에 메고 성전에서 나와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유월절의 절정이라 말할 수 있는 유월절의 첫날 밤인 '구속의 밤'을 준비하였다. 예루살렘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여기 저기서 양과 염소를 나무 꼬치에 꿰어 굽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화로는 흙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는데 손으로 들고 다닐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비가 오면 집 안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 무리지어 함께 양고기를 먹으며 유월절의 첫 날 밤을 축하하였다. 이 날 밤 모든 사람들은 흰색 옷을 입었다. 친척, 친구, 노인, 아이, 가난한 사람, 부자 할 것없이 모두들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가나한 사람들은 부잣 집에 초대 받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밤이기도 하였다. 이 날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함께 나누었다. 온 예루살렘은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기적을 노래하는 거대한 축제를 즐겼다.
유대인의 절기는 음력을 따른다. 따라서 니싼월 14일 전야를 절기로 지키는 유월절은 보름달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예루살렘 이 곳 저 곳에 모여 앉아 양고기를 먹으며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유대인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마짜와 쓴 나물을 먹으며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였고, 포도주와 양, 염소 고기를 먹으며 자유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포도주를 마시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이 밤이 다른 날 밤과 다릅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는가 이야기하고, 희생양, 마짜, 쓴나물 등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설명을 마치면 다 함께 할렐송(감사찬송)을 불렀다. 찬송이 끝나면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당시 축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과 로마 군인으로 부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구원해달라는 것이었다.
유월절 식사가 끝나면 밤이 깊어 새벽 한시 혹는 두시가 되었다. 이때부턴 자유롭게 잠자리에 들수있는 시간이었다. 모든 어린이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또다시 모여 출애굽에 대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계속 토론하였다. 한 밤중에 성전 문이 다시 열리면 많은 사람들은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 기도하며, 찬송하며 밤을 새웠다.
그리심산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월절
주후 70년 로마에 의하여 제 2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성전에 모여 희생 제물을 바치며 매년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되자 제일 먼저 불가능해진 것은 다름아닌 유대 종교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였던 희생 제사였다. 그후 유대 종교는 희생 제사 없는 새로운 종교로 발전되어 나갔다. 따라서 주후 70년 이후 유월절의 희생 제사도 중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수천년 전 유대인의 유월절의 희생 제사 의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름아닌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유대인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경 시대에는 늘 일년 내내 희생 양을 제물로 바쳤으나, 오늘 날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일년 중 하루 니싼월 14일 유월절 날에만 제물을 바친다는 점이다. 이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성경 시대의 전통을 오늘 날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월절 의식은 학자들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한 번 그곳에 가서 그들이 드리는 유월절 희생 제사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일년에 한 번 밖에 없었다. 유월절에 가야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드리는 유월절 희생 제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스라엘 유학 기간 중 벼르고 벼르다가 86년 유월절에 드디어 그리심산에 가볼 수 있었다.
사마리아인들도 다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유월절 전 날이 되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며 모든 유교병을 집안에서 없애버린다. 유월절이 되면 모든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그리심산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리심산은 한 때 그들의 성전이 서있던 곳으로 신성한 산이다. 산에 도착하면 각 가정 별로 텐트를 치고 유월절을 준비한다. 그들은 유월절 기간 전부를 그 곳에서 보낸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은 계속 새로운 전통을 만들며 계승되어 왔다. 따라서 오늘날 유대인의 유월절 행사는 구약 시대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제2성전시대 이전의 구약시대의 유월절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그들이 다른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일체 피해왔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행하는 많은 전 통을 모른다. 이러한 전통들은 이미 사마리아 사람들이 일반 유대인들로 부터 분리해 나가고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대에 계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마리아 유대인들이 유월절 의식의 기준을 철저하게 구약 성서에 두고 있다는데 있다. 구약 성서에서 어긋나는 것은 전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관습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유월절 희생제사를 준비한다. 모든 사마리아 남자들은 흰 옷을 입고 유월절을 기다린다. 마침 필자와 필자의 아내가 그리심산에 도착하였을 때는 유월절 전 날 오후였는데 흰 옷을 입은 사마리아 남자들과 기념 촬영도 할 수 있었다. 못보던 동양 사람을 만나서인지 유난히 우리에게 친절하였다. 그들에게서 매우 따뜻하고 친절한 인상을 받았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가보니 불을 피우기 위한 큰 구덩이를 두 군데 파 놓은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알아보니 한 곳은 양을 불에 굽기 위하여, 다른 한 곳은 희생 제물의 내장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그들은 곧 구덩이에 나무를 준비하여 불을 붙였다. 두 구덩이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뜨거운 물을 담기 위한 큰 상자 모양의 통도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그들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희생 제사는 해지기 삼십 분 전에 시작된다. 대제사장이 개회를 선언하면, 모든 사람들의 묵도로 행사가 시작된다.
이 때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은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 때 그들의 성전이 서 있었던 그리심산 정상을 향하여 얼굴을 향한다. 대제사장은 목소리를 높여 일련의 기도문을 낭송한다. 정확하게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대제사장은 그의 얼굴을 해가 지는 서쪽으로 향하고 유월절 희생양을 잡으라는 말씀이 있는 구약의 말씀을 읽기 시작한다. 열댓명의 젊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손으로 양을 잡아 두 다리 사이에 눕혀놓고, 타오르는 불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서서, "모든 이스라엘의 회중은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양을 잡을찌니라"라는 대제사장의 명령을 기다린다. 이 때 한 마리의 양을 여분으로 준비한다. 만일 제물로 바치는 양 중에 흠이 있는 것이 발견되면 대체하기 위함이다. 대제사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마리아의 젊은이는 일제히 양을 도살한다. 그리고 양의 피를 취하여 자기의 얼굴에 찍어 바른다. 모든 사람들은 환호하며 서로 어깨를 끌어 앉는 인사를 나눈다. 자기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상대방의 왼쪽 어깨에 대고 서로 끌어 앉은 다음, 다시 자신의 왼쪽 어깨를 상대방의 오른쪽 어깨에 대고 끌어 앉는 유대인 특유의 인사법이다. 끌어 앉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볼에 입까지 마춘다.
재미있는 사실은 양을 도살한 후 양의 항문에 바람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펌프는 미리 준비되어있었다. 아마도 내장을 쉽게 분리시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사마리아 젊은이들은 도살한 양을 즉시 끓는 물에 집어 넣어 가죽을 벗겨내었다. 두 개의 구덩이엔 불이 타고 있었다. 구덩이 위에는 거대한 석쇠 모양의 쇠 망이 걸쳐있었고 쇠 망 사이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양의 내장은 분리한 후 따로 모아 불 구덩이 위에 놓인 석쇠 모양의 망에 올려 놓아 불살라 태워버린다. 사마리아 오경에 보면 내장을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장이 제거된 양은 깨끗이 물로 씻은 후 소금을 쳐서 피가 완전히 빠지기까지 두 시간 정도 기다린다. 밤 열시 경이 되어 피가 완전히 빠지면 대제사장은 양고기를 불에 구우라고 명령한다. 청년들은 피가 완전히 제거된 양들을 나뭇잎과 풀잎으로 싼 뒤 흙을 발라 불에 구울 준비를 한다. 대제사장의 기도와 함께 청년들은 막대기에 꿴 양들을 어깨에 메고 나가 불 구덩이 위의 올려 놓는다. 양이 불에 잘 구워져 익히려면 적어도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기도하던지, 잠을 자던지, 혹은 서로 이야기하며 기다린다.
사마리아 유대인들의 유월절 행사는 출애굽 당시 급하게 먹던 전통을 따라 불에 잘 익은 양고기를 급히 먹는 유월절 식사로 절정에 이른다. 유월절 식사는 양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먹는 거룩한 식사이기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타내는 축복의 식탁이다. 밤 한시 경이 되면 모든이들은 일어나 손과 발을 씻고 흰 옷을 입고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뜯어온 쓴 나물과 무교병(마짜)을 잘 익은 양 고기 위에 얹어 놓는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대제사장이 축복 기도를 올린다. 기도가 끝나면 양고기를 텐트에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에게까지 나누어 준다. 이 때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던 때를 회상하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양고기를 먹는다. 보통 20 분 이내에 양고기를 다 먹는다. 마짜와 쓴 뿌리는 빼 놓을 수 없는 유월절 식탁 메뉴이다. 대부분의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기도하며, 찬양하며, 혹은 서로 이야기하며 아침이 오기까지 밤을 새운다.
자유를 노래하는 축제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뒤로 비스듬히 편안하게 기대어 먹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법령해석집인 미쉬나에 보면 모든 유대인은 유월절 식사 시에 반드시 뒤로 기대어 먹도록 되어있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할지라도 이 날만은 뒤로 기대어 느긋하게 먹도록 규정하고 있다. 왜 이런 전통이 생겼을까? 로마 시대의 관습에 따르면 당시 모든 자유인은 식사할 때 뒤로 기대어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 랍비들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유월절 식사만은 모두가 뒤로 기대어 먹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유인인 것을 만끽하며 누리게 하였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서 자유인이 된 역사적 사실을 축하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
예수님은 최후의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그것을 자신의 살과 피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 당신 자신을 유월절에 바쳐질 희생양으로 인식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들을 넘어가셔서(유월; pass over) 이스라엘이 죽음을 면하였던 것처럼, 예수의 피를 갖는 자마다 생명을 얻을 것을 가르치셨다. 유월절마다 수 많은 양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희생되듯이,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희생되실 것을 그가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신약 성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유월절의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니싼월 14일 즉 유월절 바로 전 날에 처형되었다. 이 날은 유월절 양이 도살되는 날과 일치한다.
후기
사마리아 그리심산에서 본 사마리아 유대인들의 유월절 행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자, 도살되는 양의 모습, 불에 타는 양의 내장, 불에 그을리는 양 고기 등으로 부터 한시 빨리 떠나고 싶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사마리아의 구릉 지대가 빽빽한 올리브 나무와 함께 아름다웠다. 문득 도살된 양을 장대에 꿰어 높히 세워 놓은 모습이 생각나며,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 위로 오버 랩핑된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살리신 유월절 희생양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