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 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 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 여 명으로 유태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 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 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 ㆍ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 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 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라트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 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2기 10년간(1958년~ 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문 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도드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 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태인들에게 자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태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아이히만(Eichmann)재판 사건 1960년 5월 23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유태인 말살 계획의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태국민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5월 30일에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 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 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ㆍ사마리아 ㆍ가자ㆍ 시나이 반도ㆍ 골란 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키푸르(유태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 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 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 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 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테러리즘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은 이스라엘의 독립 이전부터 그리고 독립이후에도 수십년간 계속되어왔다. 1967년 6일 전쟁일 일어나기전 20여년 동안 수천건의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해왔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설립되면서 이 테러리즘은 전면으로 대두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산하 여러 테러 조직들이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많은 테러행위를 감행했다. 가장 악명높은 테러행위 중 하나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이었다. 1993년 테러리즘을 근절하겠다는 팔레스타인들의 약속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상의 근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2000년 9월 이후 더욱더 강화되어 수백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천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자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이 집권하에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예루살렘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네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 대를 맞이 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박멸 위협이 제거 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 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0년과 90년대 이스라엘은 백만명여명의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그들은 주로 구소련, 동유럽 그리고 이디오피아에서 이주했다. 너무나 많은 소비자들과 수많은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의 유입은 경제팽창을 가속화했다.
1984년 의회 선거에서 리쿠드 당(우파/)중립과 노동당(좌파/중립)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 당이 주도하는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군소 좌파 정당들의 연립 정부가 탄생했다. 1995년 이짝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살해된 후 1996년 새로운 정부를 위한 선거가 이루어졌다. 총리 직선제로 벤야민 네탄야후가 총리직에 당선되었고 리쿠드 당이 이끄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3년도 채 안돼 그의 정권은 퇴진하였다. 1999년 단일 이스라엘 정당 대표(좌파/중립)인 에후드 바라크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연립 내각을 구성했으나 2000년 12월 사임했다. 2001년 2월 리쿠드당 총수 아리엘 사론이 총리로 선출되었고 주요 정당들을 포함하는 연합내각을 구성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당시 내각을 구성했던 각 정당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달성하고, 경제를 개발하고 이민자를 흡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주해왔다.
*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암살
1995년 11월 5일 어느 한 극우파 청년에 의해 라 빈 총리가 암살되어 이스라엘 온 전체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고 이츠크 라빈 총리는 사병에서 총리까지 올라 이스라엘을 전쟁터에서 평화의 길목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협상이 마련되었다.
양자간 협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부수립에 대한 내용을 개설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 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한차례 서신 교환 후 1993년 9월 서명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원칙선언은 5년간의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협상의 여러 단계를 위한 기본틀에 관해 상호가 동의한 일반 원칙들을 포함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년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관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선언과 다른 합의문들은 드디어 1995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자치합의안으로 체결되었다.
이 합의안은 선거로 선출된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평의회(1996년 1월 선출됨)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설립한다는 내용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이스라엘 방위군을 재배치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합의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를 관장하는 매커니즘으로 팔레스타인의 최종 지위 합의를 이끌게 될 것이다. 잠정합의안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은 세 종류의 지역으로 나뉜다. 지역 A ? 서안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 이 지역내 군사 및 공공질서 관할권과 시민 행정관련 모든 권한 및 책임을 팔레스타인 평의회로 이양.(헤브론의 도시는 잠정합의안에 명시된 특별 조항의 대상임. 헤브론내 이스라엘 방위군 재배치에 관한 조약은 1997년 1월 체결됨) 지역 B ? 요르단강 서안의 작은 시와 마을들 포함.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지역A와 같이 시민행정과 공공질서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결정적인 안보를 책임진다. 지역 C ? 모든 이스라엘 정착촌과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그리고 인구가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 지역(계획, 지역분할, 고고학 등)과 관계된 시민행정책임 뿐 아니라 안보와 공공질서까지 이스라엘이 책임진다.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위의 관할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민행정 부문에 책임이 있다. 향후 이스라엘군 재배치 단계의 실행을 위한 일정표는 잠정 자치안에서 세부적으로 기술한 바와 같이 양측의 몇번의 회담에서 개정되었다. 특히 주목할만한 회담은 1998년 10월 열린 와이 리버 협정이었다. 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년 3월까지 재배치 절차의 1, 2단계를 마무리했다. 재배치 절차의 3,4단계는 여전히 협상중에 있다. 재배치의 결과로 요르단강 서안의 18%에 이르는 지역이 지역 A로 21%가 지역 B로 지정되어 요르단강 서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 자치아래 활동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 팔레스타인 영구 지위의 성격을 결정하기 위한 최종 지위 협상은 일정대로 1996년 5월 시작되었다. 1996년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폭탄테러는 평화협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후 회담은 3년간 중지되었고 1999년 9월 샤를 엘 쉐이크(Sharam el-Sheikh Memorandum) 평화협정 직후에 재개되었다. 이 협정에서 다루어진 사안들은 피난민, 정착촌, 안보, 국경, 여루살렘 등의 문제이다. 클린터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갖었다. 이 회담은 별다른 합의에 이르지 못한채 막을 내렸다. 이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삼자 성명은 향후 협상을 위해 합의된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차별 폭력과 테러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 수많은 사상자를 가져왔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쇄신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원을 받아 계속 증가하는 팔레스타인들의 테러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스라엘은 2002년 6월 24일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을 위한 부시 미 대통령의 연설에서 제시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제안은 모든 사안과 평화를 위한 최종 해결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 회담으로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들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삼년간 중단된 후 이스라엘과 시리아간 협상은 2000년 1월 미국의 쉐퍼드 타운에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을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2000년 3월 제네바에서 열린 클린턴 미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의 회담도 협상을 재개시키지 못한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 양측간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없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 200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425조에 따라 남부 레바논 지역의 군사지역에 모든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레바논은 아직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조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중동 국가들간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신뢰구축방안으로 기여하고 있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실무그룹들은 중동내 여러 장소에서 대때로 회담을 개최한다.
운영위원회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하에 주요 대표단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자간 회담을 조정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회담은 2000년 1월 31일에서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사태 이후 다자간 회담의 대부분의 활동은 동결되었다. 고고학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수 천년 동안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귀중한 연결고리로 약3,500여 군데의 유적지가 있다. 메기도 (이즈르엘 계곡) 의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 다윗의 도시(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시대 가옥들, 마사다의 세례장, 무수한 유태교 회당, 아직도 읽을 수 있는 헤브루어 원고로서 이사야서의 최초의 사본을 포함한 사해 문서 등, 수많은 발굴물들이 이스라엘 땅과 유태 민족의 오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발굴은 그 땅에 자취를 남겨 놓은 다른 문명의 흔적들을 밝혀냈다. 학자와 방문객을 위하여 모든 발견물들이 기록되고, 역사적 유적들은 조심스럽게 표시되어 보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