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니즘의 사상은 유대민족과 그들의 땅 사이에 오랜 유대를 기초로 한다. 이 유대는 아브라함이 이후 이스라엘의 땅이 된 가나안에 정착한 거의 4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오니즘 사상의 중심에는 유대민족의 역사적 탄생지로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생각과 그밖에 다른 곳에서의 유대인의 삶은 유랑생활이라는 믿음이 자라잡고 있다. 모세 헤스(Moses Hess)는 그의 저서 로마와 예루살렘(Rome and Jerusalem, 1844)년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기술했다.
“두 기간동안 유대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이후의 시기였고 그리고 두번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환한 시기였다. 세번째는 세번째 망명에서 돌아오는 때가 될 것이다.”
다아스포라의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적 고향과 유일한 그리고 강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또한 의식과 문학을 통해 시온을 향한 열망을 표출해왔다.
시오니즘이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땅에 귀속시키는 역사적 연계를 나타내지만 현대 시오니즘는 수세기 동안의 박해로 이어진 근대 반유대주의에 의해 19세기 민족적인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대두되었다.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 잉글랜드와 웨일즈 등 거의 모든 유럽 전역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게 된 것은 여러 번 반복된 경험으로 그들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9세기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이스라엘로의 귀환)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시오니즘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세 헤스는 다마스커스 유혈탄압(1844)에 자극받아 시오니스트 사회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레온 핀스커는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암살에 뒤이은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1881-1882)에 충격 받아 히밧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테오도르 헤쩰은 파리에서 기자로 드레퓌스사건이라는 악의에 찬 반유대주의 운동을 경험한 이후 시오니즘을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하게 되었다.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인 문제 즉 소수민족을 벗어날 수 없는 문제, 반복되는 조직적인 학살과 탄압에 대상이 되는 민족이자 유대인 거주하는 어느 곳에서나 탄압에 의해 고통이 가중되는 고향 없는 공동체라는 문제를 해결할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이스라엘땅으로의 귀환을 달성함으로써 이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알리야(aliya-이스라엘로의 이민)의 역사는 많은 부분 유대인들을 향한 살해와 차별에 직접적인 반향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알리야는 이스라엘땅에 다수의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 유대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에 강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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