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절대성 vs 상대성>
오늘의 토라포션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안식년에는 땅이 회복되고 재산은 원 주인에게로 귀속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자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웃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만약 상황이 굉장히
어렵다면 노예로 자신을 팔 수 있습니다. 또한 친족이나 돈으로 어떻게 노예를 해방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유명한 유대인 랍비
라쉬는 모든 규례가 시내산에서 왔지만 특히 안식년에 대해 모세에게 명령 하실 때 ‘시내산’이라는 장소가 특별히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특별한 지시를 포함하고 있고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며,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한 ‘구전 토라’ 역시 시내산에서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설가들은 구체적인
명령들을 가진 모든 규례들이 ‘구전법’ 형태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구전 토라를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토라로 받아들이지
않기도 합니다.
구전 토라는 우리의
전통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글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닉
쥬(믿는 유대인)들은 구전 토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시가
아니라 전통이라고 여깁니다.
메시아닉으로서 이러한 전통을 지키는 것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믿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모든 전통을 지키며 종교적이지 않고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생각합니다. 또 한편 저를 포함한 다른 믿는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대부분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로 보고, 이스라엘의 존립에 있어 전통의 중요성을 인정함으로 전통과 관습을 지킵니다. 유월절을
지킬 때관습에 따라 세데르를 지키고 ‘하가다’를 읽습니다. 또한 수콧 즉 장막절에는 네 개의 식물을 특별한 방식으로 손에 들고 전통적인 축복의 말을 하며 기념하기도 합니다. 샤밧에 촛불을 켜는 방식 또한 전통에 따라 행해집니다. 이는 우리가
이스라엘 국가의 일원이며 우리 자녀들 또한 이 국가의 미래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속국일 때도 있었고, 열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던 수천년의 역사에 걸쳐 토라가 어떻게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가정의 구조, 리더와 예배시스템 등은 큰
변화를 겪어야만했습니다. 그러나 성문화된 토라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토라의 영구적인 측면 즉 ‘절대성’과 변할 수 있는 부분인 ‘상대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리더들에게 일정한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가 상당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19)
이는 시간과 장소의
영역에서 사람은,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들은 규례를 조정할 권위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적용되며, 영구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토라의 본질적인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문 토라는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가장 높은 이상을
따르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현대 시대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할 당시의 안식년에 대한 논쟁과, B.C 1세기 힐렐(Hilel)의 수정안 등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왜 이러한 변경이
필요했을까요? 본래 안식년은 빚을 없애주는 의도로 새로운 정비를 하고 체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부자들은 안식년이 되면 빌려준 돈이 취소되어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자 힐렐은 안식년의 빛의 탕감을 취소하여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출을 해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의 기업이나 은행들도 우리가 물건을 구매하거나 통장을 만들 때, 안식년의 빛 탕감은 적용되지 않음을 명기하는 계약서를 발행하기도 합니다.
안식년은 이스라엘
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현대에 와서 고토로 돌아오기 전 까지는 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정착기 초반에 유대인 농부들은 토라의 요구에 따라 한 해를 완전이 쉬고 일을 멈추면 재정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랍비 ‘쿡’ 은
일시적으로 유대인 소유의 땅을 팔도록 허락해 주었으며 정착민들은 다른이의 소유인 땅에서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정착 시기에 이미 극한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유대인 정착민들은 랍비 쿡의 의견을 지지했고 랍비
쿡은 이스라엘의 땅에서의 유대인의 존립이라는 목적을 기반하여 농업이 멈춰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착민 편에 서서 유대인 정착이 실패하지 않도록 한 랍비 쿡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토라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리더의 역할은매우 중요하며 그 책임 또한 크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큰 권위를 부여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서 모든 말과 결정에 대해 답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더의 영향력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도 더욱 클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 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과
생활 사이에서 바른 선택을 하고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요한 1서에서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3:18-19) 신약성경의 분명한
답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른 양심에 따라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는 바른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