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목송만석 장로님 토라 예슈아 비느하스 민25:10-29:40, 유다 바카나(네타비야) 2023-07-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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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Torah-41 강의 용.pptx (69.4KB)Torah-41 강의 용.pptx (69.4KB)

‘경건한 열심’과 ‘광적인 종교적 열심’의 차이는? 


비느하스 토라포션은 모자이크처럼 다양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해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 싯딤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 입니다. 

이곳에서 모압의 딸들이 이스라엘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2만 4천명의 생명을 전염병으로 잃게 되었고 이 전염병은 레위 지파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와 미디안 여자를 죽인 후에야 멈추었습니다. 


이번 토라 포션은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사람이었던 ‘비느하스’ 의 이름을 따서 제목지어졌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이란 대부분 인간의 생명이나 가치를 무시한 ‘무분별한 광신도’ 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때론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질투에 대해 긍적적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집의 존귀함을 손상시킨 상인들과 돈에 대한 탐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변질시킨 상인들에게 채찍을 드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가판대를 엎으신 후 상인들을 무섭게 쫒아내셨습니다. 


비느하스도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열정으로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죄를 짓도록 만든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는 것과 광신적인 종교적 열심은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열심과 광적인 종교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어떠한 일에 권위를 가진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점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비느하스도 아론의 후손으로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개입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민25:12)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신앙적 열심을 그 특정한 순간만큼은 적절한 것으로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2천년간 이스라엘이 열방에 흩어져 있는 동안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시기 위해 고대 전통과 종교적 열심을 사용하십니다. 

마라노(Marrano: 스페인 포르투갈 유대인) 유대인들은 메주짜를 문설주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당하자 작은 피리에 메주짜 말씀을 숨기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또 유월절에는 유월절 빵 무교병을 지하에서 구웠고, 대속죄일에는 카드놀이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모여서 기도하였으며 샤밧촛불을 케비넷 안에 숨겨서 키거나 거울앞에 초를 놓아 두개 처럼 보이게 하는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냄으로 유대적인 것들을 자녀들에게 전수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종교적 행위와 전통을 매우 존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많은 광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유대교가 극단적으로 이용되어 나라를 어렵게만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작은것에 집중하느라 큰것을 놓쳐버리는 것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종교적 행함이 중요한 것이라면 믿음 또한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0)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종교적 지도자들 보다 더 종교적으로 아주 상세한 것들까지 모두 지켜야 한다는 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순수한 믿음,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 토라를 우리 마음에 새기고 마음속에 토라가 들어오도록 하여 중심으로 토라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과 즐거움으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종교와는 달리 믿음은 우리의 태도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중점을 둡니다. 단지 해야만 하는 집안일을 해치우듯이 규례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의도를 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즐거움으로 섬겨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치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중요하게 보시며 이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장 높은 수준은 사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종교적 행함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종교적 행함은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4-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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